한미 갈등 속 ‘맞서지 않겠다’는 결심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에 따르면 인터뷰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국산 제품에 부과한 고율 관세에 대해 한국은 "맞서 싸우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입장은 한덕수 권한대행이 지난 8일 CNN에서 밝힌 내용과 동일하다. 그는 이 같은 발언의 배경으로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제공한 경제적, 기술적, 안보적 지원을 강조하며, 한국은 미국에 대한 역사적 부채가 있으며 그에 따라 이번 관세 문제에 있어 대립보다는 협력적 해법을 추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한국의 대미 무역흑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한국산 자동차와 일부 전자제품에 대해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으며, 방위비 분담 문제까지 무역 협상과 연계할 방침임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에 따라 한국의 자동차, 반도체, 제약 등 주요 수출 산업에 일정 부분 피해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 총리는 미국과의 무역 관계를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이번 협상이 양국 모두의 이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산업별 구조조정, 시장 개방 확대, 새로운 투자 기회 창출 등 여러 측면에서 한국 경제에 긍정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그가 대통령 권한대행이자 비선출직 인사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협상에 대한 국내 정치권의 정당성 논란도 동시에 불거지고 있다.
복합적 무역 쟁점: 관세를 넘어
미국 측은 한미 간 무역협상의 구체적인 쟁점이 대부분 비관세 장벽에 집중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한국의 자동차 배출가스 기준과 안전성 규제, 제약산업의 가격 책정 체계, 그리고 특정 미국산 농축산물에 대한 수입 제한이 있다. 또한, 넷플릭스와 같은 미국계 글로벌 콘텐츠 플랫폼에 부과되는 망 사용료 역시 미국 측이 불공정하다고 판단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들 항목은 단순한 관세 문제를 넘어, 산업 규제와 정보·문화산업 규제까지 포함하는 보다 복합적인 무역 갈등의 양상을 보여준다.
한국은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여, 무역수지 개선을 위한 실질적 방안을 다각도로 제안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국산 LNG 도입 확대와 같은 에너지 자원 협력, 보잉 항공기 등 미국산 고부가가치 제품 구매 확대, 그리고 해군 함정 공동 건조와 같은 방위산업 협력 등이 이에 포함된다. 이는 단순한 수입 증대에 그치지 않고, 전략적 동맹으로서의 산업 협력 강화를 의도한 것으로 해석된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주요 제조 대기업들은 이미 미국 내에서 반도체, 전기차 배터리, 태양광 패널 등의 생산 거점을 구축하며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투자를 단행해왔다. 이는 한국이 단순한 수출국이 아니라 미국 경제에 실질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으로도 볼 수 있다.
방위비와 무역의 연계: 동맹인가 거래인가
트럼프 대통령은 무역과 방위비 문제를 명시적으로 연계하겠다고 천명하였다. 그는 한국이 주한미군 2만8,500명의 주둔에 대해 적절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를 무역 양보의 조건으로 삼고 있다. 이는 한미동맹의 전통적 구조를 경제적 거래의 논리로 재구성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이에 대해 한덕수 권한대행은 방위비 협상의 '구체적 틀은 아직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바이든 행정부와 체결한 기존의 방위비 분담 협정을 재논의할 여지는 열어두었다. 그는 안보와 무역을 별개의 영역으로 다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되, 한미 협력의 연속성과 전략적 유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실용적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제공하는 군사 보호를 경제적 양보와 명시적으로 연계하려는 시도는 한국 입장에서는 외교적 부담과 함께 국민 여론의 비판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 특히 방위비 문제는 단순한 예산 배분이 아니라, 동맹의 성격과 한국의 자주적 국방역량에 관한 정치적·감정적 요소를 수반하는 민감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2024년 10월 4일 한미 양국이 체결한 제12차 방위비분담특별협정(SMA)은 이미 2026년부터 2030년까지의 5년간 방위비 분담 방침을 명시한 바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방위비 분담 재논의가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이는 이미 체결된 협정의 안정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권한대행이 이러한 중요한 외교·안보 사안을 좌우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를 동반하게 된다.
권한대행 협상의 헌정적 한계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은 국민의 직접적인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아닌, 단지 행정부 내에서 임명된 일개 관료에 불과하다. 이러한 비선출직 인사가 외교·경제적으로 국가의 중대한 방향을 결정짓는 협상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내 정치권과 시민사회로부터 심각한 민주적 정당성 결여 문제를 지적받고 있다. 민주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그가 헌정 질서상 중대한 외교적 합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은 절차적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심각한 위반으로 간주될 수 있다.
특히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령 시도 논란으로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된 직후, 조기 대선을 앞둔 혼란한 정국에서 이뤄지는 외교 협상은 정당성 부족 논란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더욱이, 해당 조기 대선이 6월 3일로 예정되어 있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상황임을 고려하면, 현 권한대행 체제에서 중대한 외교정책 결정을 내리는 것이 헌법적 절차와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반영하지 못할 우려가 크다.
최근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을 일시적으로 중지시킨 가처분 결정을 내린 사례는, 권한대행의 권한이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대체하기에는 명백히 제한적이라는 점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이는 권한대행이 본질적으로 헌정 질서 유지를 위한 임시행위자에 불과하며, 정책 결정보다는 현상 유지를 중심으로 그 직무가 한정되어야 한다는 헌법적 해석에 힘을 실어주는 판단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서 체결되는 외교 협정은 차기 정권의 승인 없이 실질적인 외교적 효력을 유지하기 어렵고, 협상의 법적·정치적 연속성과 국가적 신뢰도를 훼손할 우려가 매우 크다. 이는 향후 외교 정책 결정의 근간에 심각한 혼선을 초래하고, 대한민국의 대외 협상력이 구조적으로 약화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이와 동시에 한덕수 총리의 국정 운영 능력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론도 일정 부분 존재한다. 일부 보수층과 관료주의 옹호자들은 그가 비교적 안정적인 대응으로 정치적 공백기를 메우고 있으며, 현안 대응 능력에서도 실무적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에게 조기 대선 출마를 권유하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한덕수 총리가 민주적 정당성을 갖춘 선출직이 아닌, 임명직 관료라는 점에서 본질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그의 모든 정치적, 외교적 행보는 헌법상 정통성을 지닌 대표자의 행위로 보기 어려우며, 따라서 이러한 평가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그는 현재 권한대행으로서 공직선거법상 선거의 중립성과 완결성을 보장해야 할 의무를 지닌 위치에 있으며, 정치적 중립성을 해칠 수 있는 외교·정책 결정은 자제해야 할 입장에 있다. 실제로 그는 현재까지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으며, 이번 파이넨셜 타임즈의 인터뷰에서도 "노코멘트"로 대응하고 있다. 이는 향후 그의 정치적 행보뿐만 아니라, 그가 주도한 협상의 결과에 대한 정당성 평가에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