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4일, 국회 본회의장에는 오랜만에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재현됐다. 최근 10년간 국회 필리버스터는 주로 여야 간 정치적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권력구조·사회적 이해관계가 큰 법안에서 등장해 왔으며, 가장 최근에는 2024년 7월 ‘순직 해병 특검법(채상병 특검법)’을 둘러싼 국민의힘의 표결 저지 필리버스터가 있었다. 하지만 해당 순직 해병 특검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으나, 대통령의 재의 요구(거부권)로 인해 최종적으로 폐기됐다. 그로부터 약 1년 만에, 이번에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편을 골자로 한 ‘방송3법’(방송법, 방송문화진흥회법, EBS법) 처리를 놓고 다시 한 번 필리버스터가 실시됐다.
4일 본회의에서는 필리버스터에 앞서 주요 법안들이 표결·의결됐다. 이날 본회의에서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쌀값 하락 시 정부의 차액 보전 및 초과 생산량 의무매입), 농수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농안법) 개정안(주요 농수산물 가격 하락 시 정부의 가격안정제 신설), 그리고 AI 디지털교과서 법적 지위 등 교육부 소관 법안들이 각각 처리됐다. 이처럼 민생법안들이 처리된 뒤, 이번 필리버스터 역시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 대 장악 우려’라는 근본적 갈등의 최전선에서, 여야가 각자의 명분과 이해관계를 걸고 정면 충돌하고 있다.
필리버스터 진행 경과와 여야의 전략
이번 필리버스터는 2025년 8월 4일 오후 4시 신동욱 국민의힘 의원의 7시간 30분 발언으로 시작됐다. 이어 이상휘 의원 등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이 릴레이 방식으로 토론을 이어갔다. 이에 맞서 더불어민주당은 필리버스터 개시 3분 만에 토론 종결 동의안을 제출했으나, 국회법상 토론 개시 후 24시간이 지나야 필리버스터 강제종료 표결이 가능하다. 따라서 8월 5일 오후 4시 3분이 되어야 강제종료 요건(재석 의원 5분의 3, 180석 이상)을 충족해 표결할 수 있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방송 장악 시도", "시민단체·노조의 방송 경영권 장악"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며, 해당 개정안이 1980년 신군부 언론통폐합에 버금가는 언론 자유 훼손 시도라고 주장했다.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공영방송의 실질적 독립성 회복"과 "정치권 개입 차단"을 전면에 내세웠다. 방송법 등 방송3법 처리는 이재명 대통령의 ‘3대 개혁’(검찰·언론·사법) 공약의 핵심 이행이라는 입장이다.
방송법 개정안 주요 내용과 정책적 맥락
방송법 개정안은 공영방송 이사회 구성과 추천권을 다양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KBS, MBC, EBS 등 공영방송의 이사 수를 각각 11명에서 15명, 9명에서 13명으로 확대하며, 이사 추천권을 국회 교섭단체뿐만 아니라 시청자위원회, 임직원, 학계, 변호사단체 등 다양한 주체에게 분산한다. 국회가 추천하는 이사의 비율은 전체의 40% 이내로 제한하여 정치권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사장 선임 절차를 개혁하여 사장후보 국민추천위원회를 도입하고, 이사회 특별다수제(5분의 3 이상 찬성), 결선투표제 등을 통해 사장 임명 과정의 투명성과 대표성을 높였다.
보도 독립성 강화를 위해 보도책임자 임명동의제와 편성위원회의 노사 동수 구성을 의무화했으며, 보도전문채널(YTN 등)도 동일한 지배구조 개편 대상으로 포함시켰다.
한국 필리버스터의 법적 근거와 미국과의 차이
한국 국회에서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는 국회법 제106조의2에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 발동 요건은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서명 요구서 제출이며, 진행 시 의원 1명당 1회만 발언할 수 있고, 시간 제한은 없다. 종료 조건은 토론할 의원이 더 이상 없거나 회기 종료, 또는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의 종결동의가 제기된 후 24시간이 지난 뒤 재적의원 5분의 3(180석 이상) 찬성으로 강제 종결이 가능하다.
한국 필리버스터는 의제와 관련된 내용만 발언이 가능하며, 발언 중 이석(자리 이탈), 식사, 화장실 이용 등이 원칙적으로 금지된다. 다만 2019년 문희상 국회의장 이후에는 생리현상 해결을 위한 제한적 화장실 이용이 관례화되어, 국회의장의 허가하에 인도적 차원에서 예외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미국보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운용으로 평가된다. 단, 과도한 이석이나 사적 용도의 장시간 이탈은 불허된다. 또한 회기가 끝나면 필리버스터가 종료되고, 미처 표결되지 않은 법안은 다음 회기에서 다시 표결 절차를 밟는다.
반면 미국 상원의 필리버스터는 발언 내용에 제한이 없고, 실제로 신체적 체력이 허락하는 한 잡담·책읽기 등으로 시간을 끌 수 있다. 미국 상원은 화장실이나 식사 등 일시적 이석이 원칙적으로는 불가하며, 회기가 불연속일 경우 필리버스터가 지속되지 않아 법안이 폐기될 수도 있다. 한국에 비해 발언의 자유도와 회기·표결 체계에서 차이가 있다.
최근 10년 국회 필리버스터 주요 사례
2016년에는 민주당이 테러방지법의 국정원 권한 과대 확대를 비판하며 세계 최장인 192시간 25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이어갔다. 2019년에는 선거법과 공수처법(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법) 처리를 두고 자유한국당 등이 선거제 개편과 공수처 설치에 반대하여 장시간 무제한 토론을 벌였다. 2020년에는 공수처법 등 패스트트랙 법안 표결을 앞두고 미래통합당 등이 검찰개혁과 공수처 설치 저지를 목적으로 필리버스터를 시도했다. 2021년에는 노동계 손해배상 제한을 담은 노조법(노란봉투법) 개정안에 대해 국민의힘이 쟁점법안 반대를 위해 필리버스터를 펼쳤다. 2024년에는 해병대 채상병 사망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특검법(순직 해병 특검법)에 대해 국민의힘이 필리버스터에 나섰으며, 2025년에는 공영방송 이사 추천권 등 방송3법을 두고 국민의힘이 강하게 반대하며 무제한 토론을 전개했다.
정치적 함의 및 전망
이번 방송법 개정안 필리버스터는 단순한 입법 지연 이상의 정책적 함의를 내포한다. 정치적 독립성·국민참여·언론의 자유와 책임·국회 내 합의제 민주주의의 실질적 구현이라는 본질적 과제가 동시에 부각되고 있다. 법안 통과 이후에도 이사회 다양성, 사장 선임 절차, 편성·보도 독립성 강화가 실제로 제도화될 수 있을지, 그리고 이어질 미디어 법안 처리 과정에서 여야 및 언론계, 시민사회 간 갈등이 재현될지 주목된다.
다만, 현재 필리버스터의 대상이 된 법안들은 이미 오랜 기간 논의됐거나 재의 절차를 거친 법안들이라는 점에서, 이번에 진행된 필리버스터 자체의 적절성 및 필요성에 대해서는 추후 정치권과 사회에서 평가가 이루어질 전망이다.
한편, 국민의힘은 방송문화진흥회법, EBS법, 노란봉투법, 상법 개정안 등 쟁점 법안들에 대해서도 추가 필리버스터를 실시할 예정이어서,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향후 4일 이상 국회 의사진행이 지연될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