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주년 추념식: 화해와 연대의 시간 2025년 4월 3일, 제77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제주시 봉개동 4·3 평화공원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4·3의 숨결은 역사로, 평화의 물결은 세계로"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는 과거의 아픔을 되새기고, 화해와 평화의 가치를 세계와 공유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한덕수 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를 비롯한 정부 고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 고기동 행정안전부 차관, 김동연 경기도지사, 김관영 전북지사, 강기정 광주시장 등 20여 명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함께했다. 이들은 헌화와 분향을 통해 희생자들을 기리고 역사적 책임을 되새겼다. 정당 측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소속 의원 15명이 단체로 분향하며 당 차원의 연대를 표명했다. 이에 반해 국민의힘에서는 최형두 의원이 단독 참석해, 정당 간의 역사 인식 차이를 여실히 드러냈다. 조국혁신당 김선민 대표, 개혁신당 천아람 대표 권한대행,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도 참석해 진보 정치권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졌다. 생존 희생자와 유족, 일반 시민을 포함해 약 2만 명이 참석하면서 제주 4·3 사건은 단지 지역적 사건이 아닌,
3.1운동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중대한 분기점으로 평가되며, 유관순과 손병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적 변곡점을 형성한 수많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의 희생과 헌신이 간과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단순히 일제의 지배에 저항한 것이 아니라, 독립 이후의 국가 비전을 구상하며 행동하였다. 본 기사는 이러한 덜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조명하고 그들의 역사적 기여를 알리자는 것에 목적이 있다. 조명하 – 국외에서 항일 의거를 감행한 청년 독립운동가 조명하(1905~1928)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여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로, 1928년 5월 14일 대만 타이중에서 일본 왕족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를 표적으로 한 암살 의거를 감행하였다. 그는 단도를 던지는 방식으로 공격하였으며, 이에 따라 구니노미야는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체포 후 가혹한 고문을 당한 그는 같은 해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에서 24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하였다. 그의 의거는 조선의 독립 의지를 국제 사회에 천명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대만과 한국 간 독립운동의 연대에도 영향을 미쳤다. 남자현 – 항일 무장 투쟁의 여성 선구자 남자현(187
2월 24일은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날이다. 1582년 이날,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율리우스력을 대신할 그레고리력(Gregorian Calendar)을 도입하는 교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1918년 2월 24일은 에스토니아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날로, 현재까지 독립기념일로 기념되고 있다. 그레고리력 도입 (1582년 2월 24일) 그레고리력은 기존의 율리우스력의 오차를 보정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율리우스력은 1년을 365.25일로 계산했지만, 실제 태양년(365.2422일)과 차이가 발생하면서 128년마다 1일씩 계절과 어긋나는 문제가 있었다. 이로 인해 16세기에는 춘분(3월 21일)이 실제보다 앞당겨졌고, 부활절 등의 기독교 축일이 변동되는 문제가 심화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는 1582년 2월 24일 새로운 달력 개혁을 발표하고, 1582년 10월 4일 다음 날을 10월 15일로 지정하여 열흘을 건너뛰었다. 또한, 윤년 규칙을 조정하여 100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에서 제외하되, 400으로 나누어지는 해는 윤년으로 유지하는 방식을 도입했다. (예: 1700년, 1800년, 1900년은 윤년이 아
1848년, 1965년 역사속 오늘은 세계사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 두 가지 사건을 다룬다. 1848년에 발표된 『공산당 선언』은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계급투쟁을 통한 사회 변혁을 주장하며, 이후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5년에는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 지도자인 말콤 X가 암살당하면서 흑인 민권 운동의 방향이 급진화되었으며, 이후 블랙 파워 운동과 같은 강경한 움직임을 촉진하였다. 1848년 –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출판 1. 배경 1848년은 유럽에서 민주주의와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는 혁명들이 연이어 발생한 "혁명의 해"이다.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지에서 민중이 기존 체제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거세졌고,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분석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당시 산업혁명이 진행되면서 부르주아 계급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간의 불평등이 심화되었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노동자들은 가혹한 노동 환경 속에서 착취당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공산주의 사상이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점차 확산되었다. 2. 『공산
1975년 2월 11일, 영국 정치사에 한 획을 그은 순간이 찾아왔다. 이날 마가렛 대처(Margaret Thatcher)가 보수당 당수로 선출되며, 영국 주요 정당 역사상 최초의 여성 당수가 되었다. 대처의 승리는 단순한 리더십 교체가 아니라 영국 정치와 경제에 대한 새로운 방향을 예고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보수당 당수 선거와 대처의 승리 대처는 당시 보수당 주류였던 에드워드 히스(Ted Heath)의 정책과 정치적 입장에 반기를 들고 출마하였다. 히스 총리는 1974년 총선에서 연이은 패배를 겪으며 리더십이 흔들렸고, 이에 따라 당 내부에서는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대처는 강력한 보수주의 경제 정책과 시장 중심의 개혁을 내세웠으며, 1차 투표에서 예상보다 높은 지지를 얻으며 히스를 꺾고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는 기존 보수당 지도부의 변화와 함께 영국 정치 지형의 전환을 의미하는 순간이었다. 역사적 의의와 ‘대처리즘(Thatcherism)’의 시작 대처의 당수 당선은 영국 정치에 있어 중대한 전환점을 이루었다. 그녀는 이후 1979년 총선에서 승리하며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었고, 1990년까지 장기 집권하며 강력한 보수주의
오늘 2월 10일은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두 사건이 일어난 날입니다. 1948년 백범 김구 선생이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성명과, 1951년 발생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 두 사건은 대한민국의 역사 속에서 중요한 교훈을 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깊은 울림을 남기고 있습니다. 1948년 백범 김구 선생,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 발표 백범 김구 선생은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라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하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반대했습니다. 그는 성명에서 "통일된 조국"을 강조하며, 민족 분열을 막고 자주적인 통일 정부 수립을 촉구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반도는 미소 양국의 영향력 아래 분단의 길을 걸었고, 미국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지지했습니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단독 정부가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화시킬 것이라고 우려하며, 통일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백범 선생의 성명은 그의 통일에 대한 굳건한 의지를 담고 있습니다. 당시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김구 선생은 민족 통합을 위한 희망을 잃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까지 그의 통일 염원은 많은 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