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CDC, ‘모든 아동 권고’ 백신 11개로 축소

일방적 연방 지침 변화의 파장 - 의료계는 절차·투명성 문제 제기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는 ‘모든 아동에게 권고’하는 예방접종 범위를 11개 질환 예방으로 줄이고, 독감·로타바이러스·A형·B형 간염·일부 수막염·RSV 등은 고위험군 또는 의료진과의 공유 의사결정으로 전환했다. 트럼프 행정부는 보건복지부(HHS)가 20개 선진국 권고 체계를 비교한 결과 미국이 백신 종류와 접종 횟수에서 ‘이례적으로 많다’는 점을 근거로, 아동에게 가장 중요한 접종만 남겨 공중보건에 대한 신뢰를 높이겠다고 설명했다.


 

트럼프의 ‘검토 요청’과 케네디의 ‘신뢰 회복’ 프레임

 

보건복지부는 이번 개편이 지난해 12월 트럼프 대통령의 요청에서 출발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급 국가들의 백신 권고 방식을 검토하고 미국의 지침도 재검토할 것을 주문했고, 행정부는 이를 ‘과잉 권고 논란을 정리하고 공중보건 신뢰를 재구축하는 과정’으로 규정했다.

다만 이번 권고 축소가 실제로는 보건복지부를 이끄는 로버트 F. 케네디 주니어 장관의 정책 기조와 맞물려 추진됐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케네디 장관은 과거 백신의 안전성과 필요성에 대해 비판적 문제제기를 이어온 인물로 공중보건 진영에서는 백신 회의론자로 분류해 왔고, 이번 조치 역시 그가 강조해온 ‘선택권’과 ‘공유 의사결정’ 프레임이 전면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영향력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행정부는 새 일정이 더 ‘합리적’이며 다른 선진국들과의 정합성을 높였다고 설명하지만, 의료계는 과학적 자문 절차를 충분히 거치지 않은 채 권고의 문턱을 높이면 접종률 저하와 질환 재확산 위험이 커질 수 있다고 본다.


의료계의 반발 

 

 미국소아과학회(AAP)와 미국의학협회(AMA) 등 주요 단체는 이번 조정이 부모와 의료진에게 혼란을 키우고 예방 가능한 질환 부담을 다시 높일 수 있다고 지적하며, 과학적 근거를 검토하는 공개 절차가 없었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의료계는 특히 독감 백신에 대한  '권고’  종료가 시기적으로도 부적절하다는 문제 제기를 내놓았다. 또 로타바이러스와 같이 예방접종 도입 이후 입원 규모가 크게 줄어들었던 질환이 접종률 하락과 함께 재확산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연방 지침과 주 정부 규제의 엇박자 - 학교 의무접종의 변수

 

미국의 경우 백신 의무화 권한은 연방 정부가 아닌 주 정부에 있다. 그럼에도 CDC 권고는 주별 학교 의무접종 체계와 임상 현장의 표준에 사실상 준거점으로 작동해 왔고, 이번처럼 필수접종 권고의 범위를 줄이는 결정은 주 정부의 의무접종 목록과 집행 강도에 연쇄 효과를 낼 수 있다.

정책의 핵심은 권한과 표준의 괴리다. 법적으로는 주가 결정권을 갖지만, CDC가 필수접종에서 제외한 백신은 현장에서 ‘필수’로 유지될 정치적·행정적 동력이 약해질 가능성이 크다. 결국 주 정부가 CDC 권고를 그대로 따르거나 이를 참고해 의무접종 대상을 조정할 경우, 형식상 권고 변경이 사실상 ‘필수 접종 축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보험 시장도 백신접종의 변수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경우 민간보험 중심이어서 연방정부의 권고의 강도가 낮아지면, 보장 범위가 제한된 저가형 보험상품을 중심으로 해당 백신을 보장 목록에서 제외하거나 본인부담을 높이는 방식으로 반응할 가능성이 거론된다. 행정부는 ‘원하는 가정은 계속 접종할 수 있고 보험에서도 계속 부담한다’는 메시지를 내고 있다. 하지만, 권고 체계가 바뀐 이후 이윤을 추구하는 민간 보험사와 주별 규정이 어떤 속도로 이를 따라갈지는 별개의 문제라는 점에서 실무적 불확실성이 남는다.

이미 일부 주는 트럼프 행정부의 백신 지침 변화에 대응해 정치적 지형에 따라 주별로 별도의 ‘연합’ 형태를 모색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연방 권고가 표준 역할을 약화할수록 주별 기준이 갈라지거나 정책 충돌이 제도화될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다.


낮아지는 접종률과 높아지는 예외 신청 - 공중보건 리스크의 확대

 

이번 조정은 미국 내 접종률 하락과 면제 신청 비율 증가라는 추세 속에서 나왔다. 연방 자료에 따르면 아동 예방접종률이 떨어지고, 예방접종 예외를 인정받는 아동의 비중은 사상 최고치에 이르렀으며, 홍역과 백일해처럼 백신으로 예방 가능한 질환의 발생도 전국적으로 늘고 있다.

행정부는 ‘원하는 가정은 계속 접종할 수 있고 보험도 계속 부담한다’고 강조하지만, 의료계는 권고 체계 자체가 바뀌면 실제 현장에서 부모의 의사결정과 의료기관의 권유 강도, 지역사회 전반의 접종 문화가 흔들릴 수 있다고 본다. 결국 이번 조정은 단순한 필수백신에 대한 조정이 아니라, 미국의 공중보건정책이 과학적 절차와 정치적 메시지 사이에서 어디에 무게를 둘 것인지 드러내는 시험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은 ‘국가예방접종사업’으로 접종지원

 

미국이 ‘모든 아동 권고’의 범위를 줄이는 방향으로 선회한 것과 달리, 한국은 중앙정부가 ‘어린이 국가예방접종사업’을 통해 예방접종 비용을 국가가 지원하는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26년 기준 12세 이하(2013.1.1 이후 출생) 아동은 전국 보건소와 위탁의료기관에서 필수예방접종 총 19종의 백신비와 접종 시행비를 비용 부담 없이 지원받을 수 있다.

이 가운데, 미국 CDC의 ‘모든 아동 권고’(11개 질환 예방) 범위 밖에 놓인 백신을 기준으로 보면, 한국이 국가예방접종사업 지원으로 유지하는 항목은 인플루엔자, 로타바이러스 감염증, A형간염, B형간염, 결핵 , 일본뇌염 등 이다.


‘신뢰 회복’의 명분과 ‘예방 체계’의 비용

 

백신 권고는 단일 정책 수단이 아니라 예방의료의 공공재적 성격을 전제로 작동해 왔다. 권고 범위를 줄여 신뢰를 높이겠다는 접근은 단기적으로 선택권을 강조할 수 있지만, 접종률이 더 낮아질 경우 예방 가능한 질환의 재확산과 의료체계 부담이 커지는 역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책 비용을 함께 계산해야 한다.

무엇보다 변화의 절차가 투명하지 않다는 논란은 ‘신뢰 회복’이라는 목표와 충돌한다. 권고 축소 자체의 타당성 판단과 별개로, 전문가 검토와 공개 논의의 정당성을 어떻게 확보할지, 연방과 주의 기준이 갈라질 때 학교 현장과 1차의료가 감당해야 할 혼선을 어떻게 줄일지에 대한 후속 설계가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