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 전쟁 4주년을 앞두고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주한 러시아대사관 외벽에 대형 현수막이 내걸려 논란이 일고 있다. 외교부가 철거를 요청했으나 대사관 측이 응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 시점은 한국 정부가 나토(NATO)의 ‘우크라이나 우선 지원 목록’ PURL(Prioritised Ukraine Requirements List) 참여 가능성을 “검토 중”이라고 밝힌 직후와 겹치면서, 한·러 관계의 긴장이 고조되는 양상이다.
외교부 철거 요청에도 ‘미철거’…비엔나협약상 강제 조치는 난제
2월 22일 서울 중구 주한 러시아대사관 외벽에는 러시아어로 “Победа будет за нами(승리는 우리의 것)”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걸렸다. 외교부는 해당 문구가 러·우 전쟁을 연상시켜 한·러 간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할 수 있다며 철거를 요청했지만, 대사관은 22일 기준 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가 직접 강제철거에 나서기 어려운 것은 외교공관의 불가침을 규정한 ‘외교관계에 관한 비엔나협약’상 공관 시설물에 대한 국내 당국의 직접 집행이 구조적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승리는 우리의 것”…2차대전 ‘나치 독일’에 맞선 전시 구호의 부활
현수막 문구인 “승리는 우리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나치 독일에 맞서 전시 동원과 선전을 위해 널리 사용한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나치’로 규정하는 서사와 결합해 전쟁을 정당화해온 맥락에서, 서울 한복판에 걸린 대형 현수막은 단순한 기념물 이상의 상징적 메시지라는 평가가 나온다. 또한 다른 국가의 러시아 공관 외벽에 동일 문구·동일 형식의 대형 현수막이 같은 시기에 게시됐다는 사례는 공개적으로 확인되지 않아, 서울 사례의 이례성이 부각된다.
배경에 PURL…러시아 “참여하면 비대칭 보복”
현수막 논란의 배경에 PURL이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PURL은 우크라이나가 우선순위로 필요로 하는 장비·무기 요구를 목록화하면, 나토 회원국과 일부 파트너가 자금을 분담해 미국에서 조달되는 장비·군수품을 구매해 지원하는 방식이다. 나토는 2025년 8월 이후 매월 10억 달러 수준의 공약이 이어졌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이 PURL 참여를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고,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한국이 참여할 경우 “비대칭 조치를 포함한 보복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로 경고했다고 러시아 국영 통신이 보도했다.
“왜 ‘검토 중’이 보도됐나”
여기서 남는 질문은 두 가지다. 왜 한국이 갑자기 PURL 참여를 ‘검토’하게 됐는지, 그리고 왜 그 사실이 ‘검토 중’ 형태로 공개됐는지다.
검토 배경에는 나토 및 우크라이나 측의 참여 요청과 함께, 한국의 대유럽 방산 협력 환경 변화가 작용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한겨레는 “나토 회원국들과의 방산 협력이 주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전했으며, 유럽 재무장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나토 국가들이 무기 입찰 과정에서 “나토 전략에 얼마나 협조적인지”를 점점 더 중시한다고 보도했다. 즉 PURL은 단순한 ‘우크라이나 지원’ 이슈를 넘어, 유럽 방산시장 및 안보 협력에서 신뢰도 지표처럼 기능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검토 중’이 보도된 경위는 외교 관행상 여러 해석으로 설명될 수 있다. 기사에서 확인되는 범위는 “정부가 아직 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검토 중”이라는 점이다. 다만 정책적 입장표명 방식을 감안하면, 다음 세 가지 시나리오가 함께 거론된다.
먼저, 정부가 “결정”이 아니라 “검토”라는 낮은 수위로 정보를 공개해, 나토·미국·유럽과의 협의에서 선택지를 열어두면서도 국내 부담을 관리하려 했다는 설명이다. 외교부 당국자 발언 형태는 통상 ‘후퇴 가능한 표현’을 남기는 방식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다. 다음으로는 우크라이나 지원이 국내에서 민감한 쟁점이 될 수 있는 만큼, ‘결정 발표’보다 ‘검토→협의→결정’의 절차를 노출해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한겨레는 “참여하더라도 비살상 장비로 한정하는 방안이 거론된다”고 전하며, 사용처를 특정 분야로 지정할 수 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마지막으로는 협의 과정에서 정보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취재 과정에서 ‘완전 부인’이 어려워졌고 그 결과 “검토 중”이라는 최소 확인으로 정리됐을 가능성이다. 군수 조달·다자 협의는 흔적이 남기 쉬워, 일정 수준 이상 진행되면 완전 비공개 유지가 어렵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한·러 PURL 논란 보도 흐름…‘정책 검토’가 ‘상징전’으로 확장
정리하면 PURL 검토 보도가 나온 뒤 러시아의 보복 경고가 이어졌고, 그 직후 서울 공관 외벽에 2차대전 구호를 앞세운 대형 현수막이 내걸리며 상징적 긴장이 겹쳤다. 러시아 공관의 현수막이 PURL에 대한 직접 대응인지, 전쟁 4주년을 앞둔 독자적 행동인지는 공식 확인이 어렵다. 다만 다수 보도는 두 사안을 결합해 해석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