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기억과 추모의 날

그날의 진실을 다시 묻다

 

제77주년 추념식: 화해와 연대의 시간

 

2025년 4월 3일, 제77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이 제주시 봉개동 4·3 평화공원에서 엄숙히 거행되었다. "4·3의 숨결은 역사로, 평화의 물결은 세계로"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행사는 과거의 아픔을 되새기고, 화해와 평화의 가치를 세계와 공유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한덕수 국무총리(대통령 권한대행)를 비롯한 정부 고위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으며, 강도형 해양수산부 장관, 고기동 행정안전부 차관, 김동연 경기도지사, 김관영 전북지사, 강기정 광주시장 등 20여 명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이 함께했다. 이들은 헌화와 분향을 통해 희생자들을 기리고 역사적 책임을 되새겼다.

정당 측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소속 의원 15명이 단체로 분향하며 당 차원의 연대를 표명했다. 이에 반해 국민의힘에서는 최형두 의원이 단독 참석해, 정당 간의 역사 인식 차이를 여실히 드러냈다. 조국혁신당 김선민 대표, 개혁신당 천아람 대표 권한대행, 기본소득당 용혜인 대표도 참석해 진보 정치권의 적극적인 참여가 두드러졌다. 생존 희생자와 유족, 일반 시민을 포함해 약 2만 명이 참석하면서 제주 4·3 사건은 단지 지역적 사건이 아닌, 전국적 그리고 국제적인 추모의 장으로 확장되었다.


1947년의 발포와 1948년의 봉기

 

제주 4·3 사건의 기원은 1947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행사 중 벌어진 경찰의 발포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시위 도중 어린아이가 말발굽에 차이는 사고가 발생하자 군중의 항의가 격화되었고, 이를 진압하려던 경찰이 발포하면서 6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비극은 경찰과 도민 간의 갈등을 극단적으로 악화시키며 국가와 주민 간 신뢰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듬해인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은 12개 경찰지서를 동시에 공격하며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이에 대한 정부의 군사적 대응은 곧 전면적인 진압 작전으로 확대되었다. 단독 선거 반대, 좌익 세력 탄압, 미군정에 대한 반감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제주도는 극심한 폭력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초토화 작전과 대규모 학살

 

1948년 11월 계엄령이 선포되면서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다. 중산간 지역 마을의 95% 이상이 전소되었으며, 민간인 최소 2만 5천 명에서 최대 3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피해를 넘어서 공동체의 해체, 문화의 단절, 생존자들의 깊은 정신적 외상으로 이어졌다.

6·25 전쟁 발발 이후에는 보도연맹 가입자 및 그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예비검속이 자행되었다. 이들은 정당한 재판 절차 없이 섯알오름, 정뜨르비행장, 산지항 등지에서 집단적으로 총살되거나 바다에 수장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구체적인 혐의 없이 과거의 정치적 이력, 또는 단순한 의심과 밀고, 사적인 원한 등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진실규명과 연좌제의 그늘

 

제주 4·3 사건은 단지 지역 사회에 국한된 갈등이 아닌,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국가 폭력 사례로 남아 있다. 이와 함께, 희생자 가족들에게는 또 다른 고통이 이어졌다. 바로 연좌제에 따른 차별이었다. 제주 4·3 사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유족들은 수십 년간 군·경찰 채용, 공무원 임용, 대학 진학, 취업 등 사회 전반에서 차별을 겪어야 했다. 공식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1980년대까지도 이들의 삶은 '가족이 문제였다'는 낙인 속에서 제약받았다. 유족의 86%가 연좌제로 인해 불이익을 경험했다는 통계는 그 고통의 깊이를 잘 보여준다. 이는 사건의 물리적 피해를 넘어, 세대 간 트라우마와 구조적 불평등으로까지 이어진 또 다른 형태의 피해였다.

그뿐만 아니라, 연좌제는 제주 4·3 이후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반공주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제도적 차별로 정당화되었고, 일부 유족들은 자신의 출신을 숨기기 위해 이주하거나 성을 바꾸는 등의 선택을 강요받기도 했다. 특히, 교사와 공무원, 군인 등 공직 분야에서는 ‘출신 성분’이 중요한 기준이 되어, 아무런 죄 없는 후손들이 한 세대 이상 사회적 배제와 침묵 속에 살아가야 했다. 이러한 후속 피해는 단지 개인의 삶에 국한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기억과 역사, 정체성 형성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가 권력이 국민을 보호하지 않고 억압한 이 비극은, 유족과 생존자들에게 침묵과 사회적 낙인을 남겼다. 2000년대에 들어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활동을 통해 사건의 진상이 점차 밝혀졌으며,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공식 추념사에서 국가의 책임을 처음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 이후 명예 회복과 피해자 보상 정책이 점차 추진되었으며, 2025년 기준으로 총 14,822명의 희생자와 110,494명의 유족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과거를 넘은 오늘의 질문

 

제주 4·3은 단지 과거의 비극을 되짚는 날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정의는 실현되고 있는가?”, “화해는 가능한가?”

진정한 추모는 기억을 행동으로 옮기는 데 있다. 평화교육 확대, 피해자 기록의 디지털 아카이빙, 문화예술과의 융합적 접근 등은 앞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실천적 과제다. 그날의 진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주 4·3은 지금도 우리 역사의 현재진행형이다.